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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치켜세울까, 추켜세울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한다. 인간관계에서도 진심이 담긴 칭찬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선 아직 칭찬에 인색한 듯하다. 또 과한 칭찬을 받으면 “너무 치켜세우지 마세요”라며 겸손함을 내세우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다.   ‘치켜세우다’는 ‘정도 이상으로 크게 칭찬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다. “한때는 사람들이 그를 영웅으로 치켜세운 적도 있었다” “감독은 선수들을 치켜세웠다”처럼 쓰인다.   그러나 많은 이가 ‘치켜세우다’를 ‘추켜세우다’로 잘못 쓰곤 한다. ‘추켜세우다’는 ‘위로 치올리어 세우다’는 의미를 나타낼 때 쓰는 단어다. “그는 놀란 듯 눈썹을 추켜세웠다” “몸을 추켜세우고는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가 이런 경우다.   “모두가 그를 애국자라 추어올렸다”에서와 같이 과하게 칭찬한다는 의미로 ‘추어올리다’를 쓰기도 한다. ‘추어올리다’ 대신 ‘치켜올리다’나 ‘추켜올리다’를 쓰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모두 잘못된 표현이다.   ‘치켜올리다’는 ‘추켜올리다’와 ‘추어올리다’의 북한어다. ‘추켜올리다’는 크게 칭찬한다는 뜻이 아닌 ‘위로 솟구어 올리다’라는 의미만 지니고 있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추켜올리며 걸었다”와 같이 쓸 수 있다.   정리하면 ‘치켜세우다’와 ‘추어올리다’만 크게 칭찬한다는 의미로 쓸 수 있다.우리말 바루기 우리 사회

2023-09-11

[기고] 작용과 반작용

뉴턴의 운동법칙(Newton’s laws of motion) 중 하나에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이는 모든 작용에 대하여 항상 방향이 반대이고, 크기가 같은 반작용이 뒤따른다는 것이지요. 모든 물체가 잡아당기는 작용을 가하면 되돌아가려는 반작용이 생겨난다는, 고전역학이 바탕을 이룬 물리학적 이론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용, 반작용의 법칙’은 자연의 운동법칙일 뿐 아니라 정치나 일반사회에서도 적용이 되는 법칙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식사대접을 하면 나도 그에게 차라도 대접 하고 싶고,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져 상대방을 똑같이 칭찬하게 되며, 욕을 먹으면 똑같이 욕을 하거나 불평을 하게 됩니다. 이 순리가 작동되지 않으면 결국 갈등이 쌓이고, 쌓이면 둑이 터지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지금은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일도 막을 수 있을까’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둑이 터지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또 다른 새로운 국면을 맞을 뿐이지요.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 상호간의 믿음조차도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으면 상대방도 믿고 내가 믿지 않으면 상대방도 믿지 않습니다. 또 내가 의심하면 상대방도 의심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서로 믿지 못하는 의심 때문에 계약서라는 것도 생겼습니다. 계약할 때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투게 되고, 그래서 계약은 가진 자, 즉 힘센 자에게 유리하게 체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늘 사회 전반에서 문제가 야기되고 있는 갑과 을 간의 갈등은 이래서 생겨나는 것이지요.     성경 마태복음(마 7:12)에 ‘모든 일에 네가 대접받고 싶은 만큼 남을 대접하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는 대접, 즉 작용이 있으면 그만한 대접, 그 반작용이 되돌아온다는 것이고 내가 남을 대우하는 만큼 남들도 나를 대우한다는 작용, 반작용의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의 복잡한 인간관계는 서로 믿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자연의 운동은 똑같은 질량의 운동량이 되돌아오지만 사회관계에서도 경우는 틀릴 수 있어도 그에 상응하는 반작용의 갚음이 분명히 있습니다. 누구든 주어진 현안의 해결을 위해서는 냉철한 이성과 치밀한 사고가 필요한데 우리 사회는 나날이 짜증만 더합니다.  특히 정치하는 인간들은 그저 ‘치고받는’악순환만을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합을 찾기가 참 어렵습니다.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법과 제도’만으로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우선 내 가정, 내 가족부터라는 개인적인 각성과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변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즉, 관심과 배려가 정(正)이라면 감사와 보답은 반(反)이고 합(合)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 사회는 모든 이에게 충분히 살만한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나라도 보수와 진보가 서로 상생하는 정반합의 방향으로 제대로 발전될 것입니다. 이는 상식이지만 사람들은 늘 잊고 삽니다. 손용상 / 소설가기고 반작용 작용 작용 반작용 사회 구성원 우리 사회

2022-09-07

[기고] 작용과 반작용

뉴턴의 운동법칙(Newton’s laws of motion) 중 하나에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이는 모든 작용에 대하여 항상 방향이 반대이고, 크기가 같은 반작용이 뒤따른다는 것이지요. 모든 물체가 잡아당기는 작용을 가하면 되돌아가려는 반작용이 생겨난다는, 고전역학이 바탕을 이룬 물리학적 이론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용, 반작용의 법칙’은 자연의 운동법칙일 뿐 아니라 정치나 일반사회에서도 적용이 되는 법칙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식사대접을 하면 나도 그에게 차라도 대접 하고 싶고,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져 상대방을 똑같이 칭찬하게 되며, 욕을 먹으면 똑같이 욕을 하거나 불평을 하게 됩니다. 이 순리가 작동되지 않으면 결국 갈등이 쌓이고, 쌓이면 둑이 터지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지금은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일도 막을 수 있을까’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둑이 터지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또 다른 새로운 국면을 맞을 뿐이지요.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 상호간의 믿음조차도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으면 상대방도 믿고 내가 믿지 않으면 상대방도 믿지 않습니다. 또 내가 의심하면 상대방도 의심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서로 믿지 못하는 의심 때문에 계약서라는 것도 생겼습니다. 계약할 때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투게 되고, 그래서 계약은 가진 자, 즉 힘센 자에게 유리하게 체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늘 사회 전반에서 문제가 야기되고 있는 갑과 을 간의 갈등은 이래서 생겨나는 것이지요.     성경 마태복음(마 7:12)에 ‘모든 일에 네가 대접받고 싶은 만큼 남을 대접하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는 대접, 즉 작용이 있으면 그만한 대접, 그 반작용이 되돌아온다는 것이고 내가 남을 대우하는 만큼 남들도 나를 대우한다는 작용, 반작용의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의 복잡한 인간관계는 서로 믿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자연의 운동은 똑같은 질량의 운동량이 되돌아오지만 사회관계에서도 경우는 틀릴 수 있어도 그에 상응하는 반작용의 갚음이 분명히 있습니다. 누구든 주어진 현안의 해결을 위해서는 냉철한 이성과 치밀한 사고가 필요한데 우리 사회는 나날이 짜증만 더합니다.  특히 정치하는 인간들은 그저 ‘치고받는’악순환만을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합을 찾기가 참 어렵습니다.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법과 제도’만으로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우선 내 가정, 내 가족부터라는 개인적인 각성과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변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즉, 관심과 배려가 정(正)이라면 감사와 보답은 반(反)이고 합(合)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 사회는 모든 이에게 충분히 살만한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나라도 보수와 진보가 서로 상생하는 정반합의 방향으로 제대로 발전될 것입니다. 이는 상식이지만 사람들은 늘 잊고 삽니다.   곧 추석이 다가옵니다  모두가 이웃들에게 꼭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도 좋은 생각, 좋은 마음을 베풀기를 희망합니다. ‘베풀면’ 반드시 ‘되돌아’옵니다. 전화위복은 마음먹기에 달렸고 칭찬과 배려, 그리고 그렇게 각자가 스스로 돕는 마음을 지니면 반드시 하늘이 도와줍니다. ‘작용’과 ‘반작용’은 꼭 물리학에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손용상 /소설가기고 반작용 작용 작용 반작용 사회 구성원 우리 사회

2022-08-29

[문화 산책] 사람 귀하게 여기는 사회

신문이나 잡지에서 내가 가장 반갑고 관심 있게 읽는 것은 인터뷰 기사다. 사람 이야기인 인터뷰 기사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람 공부를 널리 펼치는 흥겨운 마당이다. 뭔가 배울 점이 있는 사람들의 속 깊은 이야기에서 감동을 받고, 나를 되돌아보는 귀한 배움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동네 신문에서는 인터뷰 기사가 거의 없어서 섭섭하다. 아마도 인력은 부족한데 품이 많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해봐서 조금은 아는데 대상 인물을 선정하고, 정보를 정리해서 질문 자료를 만들고,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기사로 정리하고…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한국이 선진국에 당당하게 진입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다. 그런데 언론을 통해서 보고 읽는 한국의 사람 대접은 전혀 선진국이 아닌 것 같다. 특히나 선거철의 정치판 돌아가는 꼴을 보면 선진국은커녕 맹수들이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동물의 왕국으로 보인다. 서로 헐뜯고 깎아내리기에 정신없이 바쁘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 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 없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물론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장점과 단점을 함께 가지고 있고,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고 실수를 할 수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평가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의 단점을 따스하게 감싸주고, 좋은 점을 찾아 북돋아주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작은 모임이나 나라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명언도 있는 것 아닐까.   사람의 좋은 능력을 북돋아주는 노력 없이, 흠집을 찾아내서 끌어내리다 보면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큰 손실이 생길 수 있다. 친일파 논쟁 같은 것이 좋은 예다.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서 함부로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다각도로 다시 생각해봐야 할 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다른 분야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공부하는 미술 분야만 보아도 친일파 시비로 인한 손실이 매우 큰 것으로 여겨진다.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고, 좋은 작품도 많이 남긴 큰 작가 중에 친일파로 몰려 매장된 이가 적지 않다.   일단 친일파로 찍히면 가차없이 역사의 그늘로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친일파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기준은 참 애매한 경우가 많다. 더구나, 그런 판단이 정치적 이념이나 진영논리에 좌우되면 매우 위험해진다.   안타깝기는 미투 운동도 마찬가지다. 플라시도 도밍고 같은 국제적 거물도 간단하게 날려버리는 걸 보면 미투의 위력이 참 대단하다. 그런 운동이 왜 필요한지는 잘 알겠고, 철저하게 파헤쳐 도려내는 엄격함도 이해는 되지만 마음은 편치 않다. 손실도 너무 크다.   다른 분야는 잘 모르겠고, 내가 한때 몸담았던 한국의 연극 동네는 중요한 핵심 부분이 뭉텅 잘려버리는 바람에, 몰골이 영 말씀이 아니게 되었다. 미투로 밀려난 이들이 다시 활동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물론 그 덕에 다음 세대들의 마당이 열린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지만 역사의 큰 물줄기가 막혀버린 것은 못내 아쉽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친일파 쳐내고, 왼쪽 날개(좌익) 잘라내고, 미투 도려내고 나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그런 의문이 들 만큼 쳐내고, 잘라내고 도려낸 부분이 너무 크다는 것은 문제다.   이처럼 사회적 문제가 된 일들은 그나마 다시 논의할 여지라도 있지만,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그늘에서 벌어지고 있는 ‘터무니 없는 깎아내리기’ 때문에 생긴 손실이 얼마나 클까? 그런 생각을 하면 서글퍼진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 산책 사회 사회적 문제 우리 사회 인터뷰 기사

2022-04-14

[기고] 사회적 ‘공존지수’를 높여라

언젠가 TV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직장의 신’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그 내용 중 한 장면에 가까스로 권고사직 위기에서 벗어난 만년 과장이 자신을 도와 준 여직원에게 이렇게 고마움을 전하는 대사가 있다.     “혼자서는 못 가. 시계가 어떻게 혼자서 가? 작은 바늘, 큰 바늘이 다 함께 가야 나 같은 고물도 돌아가는 거야.”     주역에 ‘이인동심 기리단금(二人同心 其利斷金)’이란 말이 있다. ‘두 사람이 한마음이면 단단한 쇠도 자른다’는 뜻이다. 이는 함께 사는 사람들과의 인간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비유를 얘기하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학자들은 ‘공존지수’ 혹은  ‘NQ지수(Network Quotient)’라고 부른다.     이 개념은 지능지수(IQ), 감성지수(EQ)와는 별도로 근간에 새로이 생겨난 일종의 신종지수라고 한다. 즉 공존지수(NQ)란 직장이든 조직이든 필요할 때는 사보타지(sabotage)가 아닌 긍정적으로 ‘함께 나누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물론 각자 개인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능력이 바로 ‘공존’의 실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를 들어 물 속을 들여다보면 작은 물고기들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떼를 지어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작은 물고기 하나만 보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여럿이 한데 모여 움직이면 그 거대한 모습에 큰 고기들이 쉽게 근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 자신이 하는 업무를 팀원들과 공유하기를 꺼려하며 그저 불평만 일삼고 남에게 ‘너나 잘하라’며 앞에서 면박을 준다든가 쓸데없이 뒤에서 헐뜯기나 하는 사람들은 성공도 어려울 뿐, 후일 꼭 본인도 ‘헐뜯음’을 당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공존지수는 그 수치가 높을수록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쉽고 또 그 소통으로 인해 얻은 것을 자원으로 해서 더 성공하기 쉽다는 개념이다. 물론 내가 속한 집단은 잘 되고 다른 집단은 소외시킨다는 ‘패거리’ 개념이 아니라 서로 잘 살도록 도와야 한다는 ‘이타적(利他的)’ 개념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근간 고국의 혼란스러운 정국 사태를 거의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밤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정치에 큰 관심을 가졌기보다는 솔직히 그동안의 코로나 비상에 의해 바깥출입이 제한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른바 ‘방콕’이 길어지니 자연히 거의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흘러간 영화나 괜찮은 유튜브의 전문 역사물 보기로 시간을 죽인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웬만한 영화보다는 대선후보들의 치고받기와 그 배후들의 모략과 음모, 배신, 편짜기와 뒤통수 때리는 실제의 장면들이 훨씬 흥미를 끄니 참 헷갈린다.       그런가 하면 내가 사는 미국 사회도 대동소이하다. 늘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 사회가 어쩌다 시정잡배들보다 훨씬 더러운 정치판 모리배들의 죽기 살기 투견장이 되고 있으니 역겨운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얼마 후면 해가 바뀐다. 싫든 좋든 ‘새해’라는 의미 있는 새 날을 앞두고, 우리는 비록 이국에 살더라도 이웃과 더불어 잘 살기 위해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해 주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며 칭찬해주는 자세를 갖는다면 사회적 공존지수(NQ)는 자연히 높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개인에 집착하기보다는 이웃을 도우며 함께 성공을 이끄는 것이 더 큰 행복의 지름길이 된다’는 ‘윈윈’의 이치고, 바로 우리네 삶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손용상 / 소설가·한솔문학 대표기고 공존지수 사회 사회적 공존지수 우리 사회 정치판 모리배들

2021-12-07

[문화 산책] 2등도 대접받는 사회

 연극을 제법 오래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얄궂은 버릇이 생겼다. 그냥 지나쳐도 좋을 일상의 자잘한 장면을 보면서 내 멋대로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 것이다. 그런 일이 즐겁다. 가령 이런 식이다.   음악회 연주 장면을 영상으로 본다.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독주자가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연주자의 진지한 얼굴 표정, 바이올린 현과 활의 격렬한 어울림… 때로는 지휘자의 멋진 모습도 비춘다. 화려한 연주복으로 잘 차려입고 악기에 몰두하는 독주자 뒤쪽으로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연주자의 모습이 보인다. 독주자를 바라보는 연주자의 눈길이 뭔가를 말하는 것 같다. 여기서부터 내 멋대로의 상상력이 시작된다.   두 사람은 친한 친구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음악학교 동기동창일 것이다. 학교 다닐 때 두 사람은 우정으로 똘똘 뭉쳐 늘 붙어 다니는 사이였다. 실력은 막상막하였고, 장래의 꿈도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미묘하던 차이가 세월이 흐르고 이런저런 사연이 겹치면서 점점 더 벌어져갔다. 무엇이 차이를 만들어낸 것일까? 실력, 우연, 불쑥 찾아든 사랑과 연애, 환경, 운명, 성공을 향한 지독한 집념….   그렇게 세월은 흘러 한 사람은 유명한 독주자가 되고, 한 사람은 평범한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어, 한 무대에서 연주를 한다. 많은 생각이 오가는 것이 당연하다. 성공한 친구에 대한 축하와 자랑스러운 마음, 그 밑에 깔린 부러움, 시샘, 열등감, 자괴감 등등… 연극의 한 장면이다.   하지만 누가 더 행복한지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가령, 첼리스트 재클린 뒤프레 자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힐러리와 재키’를 보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성공을 거둔 재클린의 처절한 고독이 가슴 아프다.   그런데 이런 일은 우리 현실에도 수두룩하게 널려 있다. 예를 들어 만약 미국으로 이민을 오지 않았다면 내 삶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지금보다 더 좋지 않았을까?     그런 착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제법 출세한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미국에 온 길에 일부러 들렀으니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다. 약속장소에 나가보니 비서를 거느리고 나타나서 거들먹거리는 꼴이 영 꼴불견이다.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사람이란 존재가 참 단순하고 우매해서 자기보다 잘 나가는 사람 앞에서는 주눅이 들고, 자기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에게는 우쭐대는 마음이 앞서게 마련이다. 별 근거 없는 자만심과 열등감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사는 것이다. 그 격차를 줄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비교를 하지 않으면 된다. 물론 실천은 어렵다.   문제는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가령, 우리 한국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버릇, 백인들에게는 주눅 들고, 피부 색깔 짙은 사람들은 마구 대하는 고약한 버릇의 근거와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설득력 있는 기준은 없다. 있을 수 없다.   세계적 화제의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깐부 할아버지’로 강한 인상을 남긴 배우 오영수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 인상적이다.   “우리 사회가 1등이 아니면 존재하면 안 되는 것처럼 흘러가고 있어요. 2등은 필요 없다. 그런데 2등은 1등에게 졌지만 3등에게는 이겼잖아요. 다 승자예요.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승자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애쓰면서, 내공을 갖고, 어떤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승자가 아닐까 싶네요.”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 산책 사회 바이올린 연주자 독주자 뒤쪽 우리 사회

2021-11-07

[문화 산책] 2등도 대접받는 사회

 연극을 제법 오래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얄궂은 버릇이 생겼다. 그냥 지나쳐도 좋을 일상의 자잘한 장면을 보면서 내 멋대로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 것이다. 그런 일이 즐겁다. 가령 이런 식이다.   음악회 연주 장면을 영상으로 본다.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독주자가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연주자의 진지한 얼굴 표정, 바이올린 현과 활의 격렬한 어울림… 때로는 지휘자의 멋진 모습도 비춘다. 화려한 연주복으로 잘 차려입고 악기에 몰두하는 독주자 뒤쪽으로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연주자의 모습이 보인다. 독주자를 바라보는 연주자의 눈길이 뭔가를 말하는 것 같다. 여기서부터 내 멋대로의 상상력이 시작된다.   두 사람은 친한 친구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음악학교 동기동창일 것이다. 학교 다닐 때 두 사람은 우정으로 똘똘 뭉쳐 늘 붙어 다니는 사이였다. 실력은 막상막하였고, 장래의 꿈도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미묘하던 차이가 세월이 흐르고 이런저런 사연이 겹치면서 점점 더 벌어져갔다. 무엇이 차이를 만들어낸 것일까? 실력, 우연, 불쑥 찾아든 사랑과 연애, 환경, 운명, 성공을 향한 지독한 집념….   그렇게 세월은 흘러 한 사람은 유명한 독주자가 되고, 한 사람은 평범한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어, 한 무대에서 연주를 한다. 많은 생각이 오가는 것이 당연하다. 성공한 친구에 대한 축하와 자랑스러운 마음, 그 밑에 깔린 부러움, 시샘, 열등감, 자괴감 등등… 연극의 한 장면이다.   하지만 누가 더 행복한지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가령, 첼리스트 재클린 뒤프레 자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힐러리와 재키’를 보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성공을 거둔 재클린의 처절한 고독이 가슴 아프다.   그런데 이런 일은 우리 현실에도 수두룩하게 널려 있다. 예를 들어 만약 미국으로 이민을 오지 않았다면 내 삶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지금보다 더 좋지 않았을까?     그런 착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제법 출세한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미국에 온 길에 일부러 들렀으니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다. 약속장소에 나가보니 비서를 거느리고 나타나서 거들먹거리는 꼴이 영 꼴불견이다.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사람이란 존재가 참 단순하고 우매해서 자기보다 잘 나가는 사람 앞에서는 주눅이 들고, 자기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에게는 우쭐대는 마음이 앞서게 마련이다. 별 근거 없는 자만심과 열등감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사는 것이다. 그 격차를 줄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비교를 하지 않으면 된다. 물론 실천은 어렵다.   문제는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가령, 우리 한국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버릇, 백인들에게는 주눅 들고, 피부 색깔 짙은 사람들은 마구 대하는 고약한 버릇의 근거와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설득력 있는 기준은 없다. 있을 수 없다.   세계적 화제의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깐부 할아버지’로 강한 인상을 남긴 배우 오영수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 인상적이다.   “우리 사회가 1등이 아니면 존재하면 안 되는 것처럼 흘러가고 있어요. 2등은 필요 없다. 그런데 2등은 1등에게 졌지만 3등에게는 이겼잖아요. 다 승자예요.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승자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애쓰면서, 내공을 갖고, 어떤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승자가 아닐까 싶네요.”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 산책 사회 바이올린 연주자 독주자 뒤쪽 우리 사회

2021-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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